P. 21고대의 이주와 다양한 구성원들 간의 상호 공존을 위해 만들어진 국가정책, 그리고 이주민 집단의 사회상을 검토하는 것은 민족국가 중심의 한국사 서사가 갖는 허구성을 분명히 드러낼 수 있는 작업이기도 하다. 특히 고대 한반도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다수의 이주민과 다양한 계통의 주민들이 공존하는 과정에 나타난 다문화 사회의 특성들을 도외시할 수는 없다.
P. 1304세기 중반 이후에 주로 조영된 2군 고지의 한계 석실봉토벽화분은 중국계 주민에 의해 조영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4세기 초반 이래 망명인 유입과 4세기 후반 유주·기주 출신의 유이민 다수 유입 사건 등 외래의 이주민이 고구려로 유입된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이들 이주민 집단은 2군 고지에 안치된 후 그들의 장례 문화를 상당 기간 유지했을 것이다. 2군 고지의 한계 석실봉토벽화분의 구조나 벽화 제재가 위·진대 요양 일대의 벽화고분과 연관된 측면이 많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P. 110동수·진 등의 망명인들이 2군 고지에서 생을 마감한 뒤 그곳에 고분이 조영된 것은 애초 그들이 2군 고지 이외에 복귀하거나 사후 귀장歸葬될 정도의 기반을 둔 지역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중국 고유의 양식을 따른 고분을 조영한 주체는 해당 묘주의 일족과 향인, 그리고 그와 함께 안치되었던 다수의 중국계 이주민 집단의 존재를...
P. 1764세기 중반까지 2군 고지에서 활동했던 동수·동리의 경우, 그들이 칭한 태수호 앞의 지명들은 대체로 고구려에 인접한 요동·요서 일대에 해당한다. 아마도 이 지역의 많은 이주민이 인접한 고구려로 들어와서 2군 고지에 안치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이들 이주민은 동수·동리와 같은 과거 요동 지역의 명망가를 중심으로 함께 편성되었을...
P. 234고구려는 요서의 전연·후연 정권 등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화북 유이민들을 유치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지속적인 이주를 유도하려는 목적으로 이주민들을 2군 고지 일대로 옮겨서 집주시키는 한편, 중국 출신의 고위 망명인에게는 일부 이주민 집단의 통솔을 위임하고 그가 중국식 관호를 칭하여 이주민들의 대표자로서 권위를 내세우는 행태도 일부 허용하거나 묵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